어린 시절 나에게 뮤지컬은 패션쇼였다 _ 서재이
- NERD
- 2019년 11월 17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19년 11월 17일

어렸을 때부터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수많은 뮤지컬과 오페라 공연들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눈앞엔, 현실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곤 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은 기본,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도 등장하였다. 뮤지컬과 오페라 등의 공연을 따라 흘러나오는 음악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의상들을 구경하는 것이 필자 본인에겐 즐거움이었고 행복이었다. 음,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뮤지컬 오페라가 바로 패션쇼 장이었달까. 배우들이 걸어 다니거나 춤을 출 때마다 눈 앞에서 살랑거리는 의상들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내게 그 어떤 넘버보다도 큰 감동을 주었으니깐. 여러 시대상은 물론, 극 중 인물의 환경과 성장 배경까지 드러내야 하면서도 너무 과하거나 밋밋하지 않게 작품의 완성도 자체를 높여주는 그 조화가 너무나 정교했으니깐.
본 기사를 통해, 과거의 추억을 더듬으며, 직접 본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좋았고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과 그 의상을 몇 개 다뤄보려고 한다.
뮤지컬 <위키드 Wicked>
뮤지컬 <위키드>는 소설 「오즈의 마법사」가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초록 마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오죽하면 위키드가 공연되는 극장은 공연기간 동안 극장 외부도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넘어 관객들에게도 초록색의 드레스코드를 맞춰 입고 오라고 할 정도니... 이 작품에는 약 350벌의 의상이 등장하는데, 모든 장면을 걸쳐 단 한 번도 의상이 겹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용한 원단이 7000종이 넘는다. 공식적인 의상 제작비만 40억 원이라고.

총 7벌의 의상을 10번 정도 갈아입는 글린다의 의상은 모두 화려하고 톡톡 튀지만, 그중에서도 버블 머신 드레스가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다. 극 중에서 글린다는 이 드레스를 입고 아주 우아하게 걸어 다닌다. 하지만 실제로 이 의상은 20킬로그램이라는 엄청난 무게에 달한다는 것을 아셨는지. 비누 거품을 연상시키는 천조각 50개가 겹겹이 이어진 드레스 속에는 그 부피감을 표현하기 위해 수십 장의 패치코트와 와이어를 부착했다.

또 다른 볼거리는 초록마녀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른 이후 입고 등장하는 검은색 드레스다. 서로 다른 360개 원단의 패치워크로 만들어진 이 의상은 ‘지구의 지층’에서 영감을 받아 모두 수작업으로 제작되었고, 최대한 배우의 몸에 맞춰 매우 슬림해 보이도록 디자인했다고 한다.
디자이너의 언급대로, ‘정말 마녀 의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극 중에 등장하는 온통 초록빛 세상, 에메랄드 시티(emerald city)! 색상은 오로지 초록뿐이지만 사용한 원단은 7000가지가 넘는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심지어 한국에서도 원단을 공수했을 정도. ‘에메랄드 시티’ 장면에 쓰인 의상들은 <위키드>에서도 가장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초록이라는 공통 색 안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활용했으며, 필자는 특히 파란색이 가미된 초록색이 마음에 든다. 아, 이 장면에 등장하는 의상들은 모두 비대칭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Евгений Онегин>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은 (tmi이긴 한데..)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노어노문학과를 지망하게 되면서 가장 처음 접했던 러시아 예술이다. 푸쉬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차이코프스키가 그 음악들을 작곡했다. 원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은 가장 러시아다운, 전통적인 것을 잘 표현한 오페라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2013년에 공연된 메트로폴리탄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원작을 보다 더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새롭고 참신한 감동을 주었다.

사랑에 빠진 타치야나가 밤새 사랑의 편지를 쓰는 장면은 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힌다. 오죽하면 차이코프스키가 이 장면에만 아리아를 만드려다 그냥 오페라를 제작하게 돼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편지를 쓰며 첫사랑의 두려움에 울부짖는 듯한 그녀의 아리아는 책에만 빠져 살았던 순수한 소녀의 첫사랑이 얼마나 숭고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메트로폴리탄에서는 그 강렬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 장면에서는 강렬한 원색의 붉은 드레스를 매치했다. 특히나 더 흥미로운 점은,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에서는 극 중 내내 등장인물과 같은 옷을 입은 무용수가 등장인물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내면 심리를 표현하는 동작을 하거나 춤을 춘다는 것! 무용수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따라 일렁이는 붉은 천은 보는 우리를 더 황홀하게 만든다. 미치도록 붉은 드레스, 애절하고도 찢어지는 듯한 아리아,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수는 극적인 장면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세 가지 요소이다.

친구를 죽인 후 그가 정신없이 향락적인 삶을 살았음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얇은 옷 하나만 걸친 무용수들이 등장해 오네긴과 함께 약간은 에로틱한(?) 춤을 춘다. (그러는 와중에 친구를 죽인 죄책감을 표현하기 위해 친구의 시체는 극이 끝날 때까지 저렇게 무대 한가운데에 누워있다.) 다소 향략적인 느낌의 춤에 살랑거리는 청록색 드레스는 극의 분위기와도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같은 붉은색의 드레스지만 1막의 드레스가 사랑에 빠진 타치야나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3막의 의상은 사교계의 귀부인으로 부상한 타치야나의 화려함과 기품을 보여준다. 보통 주인공의 심리나 상황의 변화를 의상으로 표현할 때 색상과 디자인 모두에 변화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메트로폴리탄은 오히려 같은 색상이지만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의상을 활용하여 그 차이에 깊이를 더했다. 왜 사교계의 수많은 귀족들 중에서도 타치야나가 남다른 기품과 아름다움을 뽐냈는지 알 수 있는 드레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

<노트르담 드 파리>는 뮤지컬 중에서도 가장 처음 접한 작품으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무언가 뮤지컬이라고 하면 화려한 의상과 조명, 무대 장치 등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장치나 의상, 조명, 혹은 현란한 사운드가 없이도 <노트르담 드 파리>는 3시간 넘짓하는 시간 동안 관객의 눈길을 온전히 끌 수 있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극의 흐름에 필요한 그저 단순하고 절제된 무대 세트만으로도 얼마든지 이야기 속의 상황들을 완벽을 넘어 더욱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7명의 인물들에게는 각각의 고유한 색이 있다. 콰지모도의 빨강, 에스메랄다의 초록, 그랭구아르의 파랑, 플뢰르 드 리스의 분홍 등… 그리고 화려하진 않지만 잔잔하게 흐르는 조명은 그들의 색채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들을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 완성시켜준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의상들은 작품의 배경인 1482년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모던하게 재해석되었다. 근위대장 페뷔스는 중세의 사슬 갑옷에서 모티브를 얻은 사슬 무늬 티셔츠를, 2막의 집시들은 현대 스트리트 패션을 연상시키는 후드티를 입고 등장한다. 꼽추 콰지모도는 불완전하고 뒤틀린 신체와 존재론적 숙명을 표현하기 위해 솜뭉치 보형물을 넣은 패치워크 형태의 의상을 입었다. 앗, 집시 에스메랄다의 의상은 그저 성의 없는 초록색의 누더기 의상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분 부분 반짝이는 비즈를 붙여 조명 아래 은은한 광을 뽐내는, 어느 드레스보다 매혹적인 누더기 옷이었다고 필자는 회상한다.
오늘날 공연 예술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저 작품의 내용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음악과 율동, 극의 조화를 감상하고, 그 시대와 주인공의 삶 속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며, 느끼고, 또 평가한다. 그렇기에 정확한 시대와 작가의 의도, 캐릭터의 표현이 무대의 여러 장치를 통해 완성도 있게 연출되어야 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무대 의상은 단순히 배우가 입는 의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관객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시대와 인물의 특징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공연 관람의 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여러 가지 공연을 관람할 때, 그 의상에도 한 번 더 깊은 관심과 눈길을 쏟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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