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기록 보관소: 오래전 그 날의 컬렉션 _ 박세종
- NERD
- 2019년 11월 17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19년 11월 17일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각자 좋아하는 브랜드와 자신만의 취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각자 본인이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출시된 새로운 컬렉션이나 한정판 아이템을 찾아보고 또 구매하는 것은 항상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필자가 그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브랜드의 아카이브 즉, 오래된 과거의 기록 또는 역사를 통해 브랜드를 이해하는 것이다. 오래된 컬렉션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 지금 보기에 낡았거나 촌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 오히려 그 속에서 새롭고 신선한 느낌과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또 어떤 브랜드나 디자이너의 팬으로서, 그의 철학과 정체성을 알고자 할 때 아카이브에 보관된 과거의 컬렉션을 통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브랜드의 컨셉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사를 통해 필자 본인 취향의 브랜드 아카이브를 소개하며, 과거의 컬렉션들을 돌아보는 것이 어떤 매력이 있고 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글을 펼쳐 나가보려 한다 (TMI 주의)
1. Number (N)ine
일본 최고의 패션브랜드라 하면 대다수는 꼼데가르송 또는 언더커버, 최근에 떠오르는 사카이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속 No.1 일본 브랜드는 바로 넘버나인이다. 사실 넘버나인은 2009년 A/W시즌을 끝으로 막을 내렸고 디자이너인 타카히로 미야시타가 “The Soloist”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설립해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나고 있다. 필자는 디자이너 타카히로 미야시타의 팬으로서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과거 컬렉션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넘버나인을 접하게 되었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넘버나인 컬렉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록과 그런지에 문화에 기반을 둔 디자인과 자연스러운 레이어드가 돋보이는 것이다. 타카히로 미야시타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비틀즈 존 레논의 광팬으로 유명한데 이러한 취향과 록에 대한 애정이 곧 그의 철학이며 또 그것이 컬렉션에 여실히 드러난다. 브랜드 네임인 넘버나인마저 비틀즈의 곡 Revolution 9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비틀즈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긴 말할 필요 없이 과거 넘버나인 컬렉션 일부를 소개하겠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트루퍼햇과 선글라스 그리고 아무렇게나 껴입은 셔츠와 재킷, 카디건은 90년대 패션 아이콘 커트 코베인을 오마주 했다.


넘버나인의 초기 컬렉션은 그런지 풍의 재해석이 주된 컨셉이었다. 아카이브에 보관된 시즌이 지나갈수록 컨셉이 점차 다양해지며 액슬 로즈나 데이빗 보위 같은 또 다른 옛 스타들을 오마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이너 타카히로 미야시타와 브랜드 넘버나인이 함께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한에 볼 수 있는 것이 넘버나인 아카이브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 과거 넘버나인의 컬렉션들과 현재 그의 브랜드 “The Soloist"의 컬렉션을 비교하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떻게 그의 철학을 유지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래에 제시된 사진을 통해 느껴보자.



2010년대에 들어서며 음악계에 힙합이라는 장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록은 지는 해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록을 기반으로 한 패션 브랜드였던 넘버나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넘버나인의 가치가 재조명받고 있다. 해외 유명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과거 넘버나인의 상품이 자주 보이고 있고, 인기 컬렉션은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곤 한다. 아마 넘버나인의 아카이브를 통해 과거의 록 문화에 대한 향수를 느낌 수 있음은 물론, 최근 패션 시장의 트렌드에서 벗어난 새로움 또는 신선함을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 Raf Simons
위의 넘버나인과 타카히로 미야시타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나 음악을 패션에 녹여내는 것은 굉장히 ‘쿨’한 일이다. 이번에 소개할 브랜드와 디자이너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라프 시몬스는 벨기에 엔트워프 왕립 예술학교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로 그의 취향과 음악에 대한 애정 그리고 젊음을 패션에 녹여내는데 탁월했던 인물이다. 최근에 들어서며 기라성 같은 새로운 브랜드들의 등장과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로 인해 과거의 명성에 비해 유명세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컬렉션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여전히 두터운 마니아층과 추종자들을 갖고 있다. 그들 또한 과거 라프 시몬스의 아카이브를 통해 라프 시몬스만의 철학과 정체성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을 통해 과거 라프 시몬스의 아카이브 일부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라프 시몬스는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이후 뉴 오더)의 열렬한 팬이었고 2003년 본인의 컬렉션에 직관적인 방법을 통해 그의 취향을 드러냈다. 군용 피쉬테일 파카에 넓게 또 눈에 띄게 프린팅 된 그래픽들은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히트작 앨범 커버들로 이후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또 프린팅 방식은 그 당시의 패션계에선 익숙하지 않고 새로운 어떻게 보면 ‘쿨’한 시도였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시각으로는 트렌드와 동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당시 2000년대 초반의 미관에 대해 알 수 있다. 라프 시몬스의 컬렉션과 프린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라프 시몬스의 정체성이다. 그의 아카이브를 들여다보면 1996년 브랜드를 전개한 이후로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래픽 워크를 컬렉션의 다양한 워드로브에 프린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프린팅 기법 자체가 아니라 각 컬렉션의 제목과 컨셉을 반영하여 디자이너 본인의 철학이 담긴 그래픽을 직접 선별하여 프린팅 했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제시된 2001 A/W 컬렉션 <riot riot riot>, 2003 S/S <Consumed>, 그리고 2003 A/W 컬렉션 <Closer>은 모두 군용 의복을 재해석했다. 미 공군에서 개발한 파일럿용 항공점퍼 일명 'MA-1'은 과거 라프 시몬스의 과거 컬렉션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riot riot riot>의 색이 바랜듯한 카모 패턴의 MA-1에 흑백의 패치워크가 이렇게나 조화로운 비주얼을 가질 것이라고 라프 시몬스 본인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록과 펑크로 대변되는 그 당시의 젊은 세대 문화를 군복 위에 프린팅 하여 융합함으로써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폭동(riot) 즉, 저항 정신을 라프 시몬스 그만의 패션에 대한 미관으로 풀어낸 것이다. 또, 2년 뒤의 <Consumed>에서는 무채색 바탕의 MA-1에 다채로운 그래픽과 상업적 로고들을 프린팅 하면서 Consumed 즉, 무분별한 소비와 당시에 넘쳐나던 과장된 광고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그의 철학을 담았다. 이렇게 다양한 군용 의복 MA-1, 피쉬테일 파카에 더하여 군용 탄띠까지 라프 시몬스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젊은이의 시각으로 보는 사회현상에 대한 관점과 철학, 기성세대의 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담은 컬렉션을 아카이브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3. 독자들에게
2019년 현재, 패션계를 이끌어가는 브랜드 중 하나인 오프화이트의 수장 버질 아블로는 Hypebeast와의 인터뷰에서 라프 시몬스의 아카이브에 보관된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답변한 적이 있다. 라프 시몬스의 컬렉션 자체도 과거의 어떤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현재 패션계의 유명 디자이너들도 라프 시몬스와 같은 이전 세대 디자이너의 과거 컬렉션에 또 영감을 받아서 작업하는 이러한 흐름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며 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흐름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마트폰 속 어플리케이션 한 번만 누르면 너무나 쉽게 수많은 신상품 정보, 한정판 아이템 광고를 접할 수 있고, 빠르게 바뀌어가는 트렌드 즉, 패스트패션 시대 속에서 살아간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상품과 이목을 집중시키는 광고들 속에서 그것들에 하염없이 이끌려 다니다 보면 본인의 정체성을 잃은 채 유행만을 좇게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필자는 과거의 기록과 컬렉션을 아카이브를 통해 직접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오래되어 먼지 덮인 과거의 컬렉션 또는 아이템의 정보를 레코드 디깅 하듯이 뒤적거리며 찾아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지금은 2019년 정보화 시대. 인터넷을 조금만 뒤적거리면 본인이 좋아하는 브랜드 아카이브 정도는 금방 찾을 수 있다. 가끔씩 우리 어린 시절의 빛바랜 사진 앨범을 찾아보는 것처럼 예전 그 시절만의 감성과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것, 그 속에서 현재의 트렌드에서 벗어난 뜻하지 않은 나만의 새로움과 신선함을 찾는 것이 브랜드 아카이브의 가장 큰 매력이자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또 과거의 자신이 좋아했던 패션 또는 현재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의 과거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결국 패션에 대한 견문을 넓히며 본인의 취향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길이고 브랜드 아카이브는 이를 도와주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신상품 광고에 대한 클릭은 잠시 접어두고 브랜드의 옛 시절 혹은 나의 어린 시절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