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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NERD

도시에서 살아남기 _ 김진석

최종 수정일: 2019년 11월 28일

프란시스 하와 데몰리션을 보았습니다. 저한테는 두 영화 모두 ‘도시’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때때로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도시의 속도에 강제적으로 자신의 몸을 맞춰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데몰리션>은 그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외면되어 왔는가에 관한 영화이고, <프란시스 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실패담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몰리션>의 주인공인 데이비스는 금융업계 종사자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마치 그의 삶을 은유하듯 실물적인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돈을 가지고 돈을 버는 일이에요. 그는 숫자를 계산하는 데는 전문가지만 실생활에선 어리숙합니다. 장인에게 몇 해 전에 선물 받은 공구세트는 전혀 기억도 하지 못하고, 아내가 계속 얘기했던 냉장고의 누수는 고칠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내가 그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냉장고 좀 고쳐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어요. 그런데 데이비스는 이상하게 슬프지 않고 초콜릿이 나오지 않는 자판기가 더 거슬렸습니다. 갑자기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의 고객센터에 병원 자판기가 고장났다는 편지를 씁니다. 그의 편지는 자판기 고장났다는 컴플레인을 넘어 어느새 자기고백이 되어 갔습니다. 이상한 건 고객센터에서 이렇게 두서 없는 글에 답장을 보냈다는 겁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울었어요. 이야기 할 사람은 있나요?”

자신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궁금해 해주는 누군가가 생기자, 데이비스는 그제서야 자신의 마음상태를 들여다 보게 됩니다. 들여다 보니 고장난 건 자판기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였어요. 데이비스는 화장실 문, 컴퓨터를 해체하다가 급기야 집 전체를 해체(혹은 파괴)합니다. 장인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벽히 분해해야 한다”는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요. 역설적이게도 그가 행한 물리적 파괴행위가 치유의 방법이 됩니다.

데이비스는 ‘타인의 기준’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어요. 돈, 사랑, 안정적인 직장. 그러나 그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을 했을지 모르나,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어요. 그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지하철에서 받은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거짓말을 합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듯한 이 상황은 이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경험했을 법한 기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정신없이 흐르고 침대에 누우면 정작 오늘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고, SNS의 사람들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고 공허한 듯한.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인 프란시스 또한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파티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설명하기 힘들다며 얼버무립니다. 일이 복잡해서냐고 다시 묻자, 그녀는 그 일을 진짜로 하고 있지는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녀는 무용수이지만 스스로에게 예술가냐고 반문하자면 아닌 것 같기 때문이죠. 오래된 절친도, 사귀던 애인도 그녀를 떠나자 그녀는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거기에 더해 경제적인 곤란은 언제나 그녀를 따라다닙니다. 다행인 점은 아내가 죽을 때 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던 <데몰리션>의 데이비스와 달리 프란시스는 ‘자신의 위치가 애매하다는 문제점’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기 위해 계속 도전합니다. 비록 대부분의 것들이 실패했지만요.

두 영화가 어느 정도 체념의 정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한테 희망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프란시스와 데이비스 모두 자아를 재발견하여 도시에 잘 적응할 것만 같은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불화하는 세계와 타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체념이 필요한 일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이비스와 프란시스가 힘들었던 이유는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사회가 혹은 스스로가 강요해서는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결말에서는 프란시스는 무용수로서의 명성이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누군가에겐 좌절로 읽힐 수도 있으나, 프란시스는 자신의 상황에서 가장 좋은 일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이름은 ‘프란시스’로 접히는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작아진 자신의 자아를 쥐고서도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프란시스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데몰리션>의 데이비스는 자신의 주변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이 거짓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해체하고 난 뒤, 마지막에 달리는 데이비스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입니다. 진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내고 있다는 생의 감각을 찾아낸 것 같았어요.

혹시 이 쌀쌀맞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잘 모르겠는 기분이 든다면 이 영화들을 보는 게 어떨까요. 저의 경우엔 이 영화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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