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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NERD

옛날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_ 강다연

괴물(2006)

바야흐로 2006년, 초4이던 나는 고학년이 됐다는 우월감과 갓 중학생이 된 언니의 조롱 탓에 아직도 초딩이라는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루 빨리 어린이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제 심신에 맞지도 않는 청소년인 척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부터 허영이 가득했다.,, 괴물을 처음 본 건 그 해 여름방학이었다. 엄마와 둘이서 영화관에 갔다. 밤 11시 즈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느낀 어둡고 습습한 공기를 잊지 못한다. 차를 타고 귀가하며 운전을 하던 엄마에게 “여기 물이랑 가까워?” 라고 은밀하게 물었다. 그 때 나는 영화의 괴물을 진짜로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다. 허구가 아닌 실질적 위협으로 느꼈다. 그래서 물에 서식하는 괴물의 위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다. 정말 단단히 겁을 먹었다. 만 10세 인생에서 손의 꼽을 만한 트라우마였다. 그날 밤부터 한달 동안 괴물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괴물이 우리 집을 씹어 삼킬 때를 대비해서 창가 가까이 잠자리를 옮기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하는지는 수치스러워서 가족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영화에서 괴물은 하필 한 낮에 나체로 등장했다. (괴물이 나체인 것은 일상적이지만, 어떤 그림자도 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탓에 머릿속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되었고 아무리 부정해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 때, 환경에 꽤 관심이 많은 어린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괴물을 더 현실적이라 느꼈거나, 혹은 괴물로 인해서 환경을 염려하는 어린이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저찌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이지만 그 때는 <괴물>이 싫었다. 어엿한 고학년인 내가 여전히 허구적 공포에 벌벌 떠는 어린이인 것을 재확인 하게 만드는 영화여서 더욱 싫었다.

이제 13년이 흘렀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청소년도 되어봤고 심지어는 부정하고 싶지만 어른이 되어버렸다. 다시 괴물을 봤다. 그 때와 달리 영화를 보면서 피식피식 웃었고 외로워 보이는 괴물에게 연민까지 느꼈다. 근데 또 공포에 휩싸였다. 영화에서 재현된 하이퍼리얼리스틱-한 한국 사회와 13년이 흐른 지금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겁에 질렸다. 공포는 일상적이고 아 주 느 리 게 소멸되며 그래서 더 무섭고 동시에 유머러스하다. 공포를 유머로라도 소비하지 않으면 습습한 무력감에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북극곰 걱정보다 내 한 몸 건사할 방법을 궁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게된 나에게 <괴물>은 공포물이라기 보다는 코미디물이 되었다. 괴물을 보고 나서는 창가에서 잠들지 않기 대신 요가를 하고 케일주스를 마신다. 직업도 없고 집도 없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것일ㄲr…?

포레스트 검프(1994)

<포레스트 검프>는 재미가 없었다. 아빠 옆에서 TV로 봤던 어린시절에도, 2년 전에 다시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봤을 때 감상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여느 OCN 방영 영화들만큼의 희미한 인상을 남겼다. 기억이 별로 좋지 않은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과제 때문이었다. 한 인물의 생애 과정이 드러난 영화를 분석하는 과제였다. <포레스트 검프>가 어렴풋이 생각났고 다운 받았다. 과제를 위함이었지만 여러 사람들의 인생 영화로 꼽히는 <포레스트 검프>였기에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재생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람들이 의문스러울 따름이었다. 포레스트라는 인물의 전기 영화나 다름 없었지만 포레스트보다는 불행한 제니와 버마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를 보는 중에는 이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미국 선전 국뽕 영화인걸까?”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맞이한 당시에 맑스주의와 비판적 국제 커뮤니케이션을 처음 배우고 미국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이 인생의 화두였다. 그때는 심지어 지금과 달리 전투적이었다. 그런 내게 포레스트 검프에서 가장 쿨한 장면은 히피들의 평화 선언 장면이었고 포레스트는 체제 순응적인 인간이라 생각했다. 영화를 체제 순응적 인간의 감동적인 인생 성공기라 못 박고 나서는 그 이상의 것을 느끼기 힘들었다. 영화는 시종일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라고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좋고 밝은 면만 보고 산다면 초콜릿처럼 인생이 달콤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지레짐작했다. 여성과 흑인으로 태어나서 가난과 폭력에 시달린 제니와 버마의 인생이 초콜릿과 같지는 않았을텐데.

그 이후로 다시 보지는 않았다. 이제와서는 영화를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본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성실함을 신성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일 뿐이라 조소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그 때와 달리 대상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 자체에 경외감을 갖게 된 요즘 영화를 다시 본다면 또 다른 것을 곱씹어보게 될 것 같다. 그렇지만 2년 전에 내가 느꼈던 감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때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되짚어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훗날에 포레스트 검프를 다시 본다면 새로운 종류의 감상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또 같은 영화를 보던 과거의 나를 돌아볼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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