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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NERD

영화 <Call Me By Your Name> _ 윤정민


00:02:45

“L’usurpateur.”

영화의 첫 대사이다. 1983년 여름,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한 시골 저택을 방문한 손님을 향해 엘리오는 개구진 17살의 목소리로 “찬탈자”라 읊조린다. 엘리오는, 어느 여름날 갑작스럽게 등장한 올리버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세계를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오는, 올리버가 등장하기 이전의 음악을 편곡하고 책을 읽고,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놀러 나가는 자극적이지 않은 일상을 따분해 하면서도, 그런대로 단조로운 일상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Later!”를 첫 문장으로 하는 원작과는 꽤나 다른 시작이다. 소설과의 다른 시작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그것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궤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15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열병처럼 앓았던 자신의 첫사랑을 추억하듯 이야기할 수 있는 소설의 엘리오와 올리버가 언제 나타날지 두려운, 아니 나타나지 않는 것조차 두렵고 자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고 버겁다고 고백하는 영화 속의 엘리오는 닮은 구석을 가졌지만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소설 속의 엘리오는 무심하고 냉정한 그 “나중에요!”라는 말, 눈을 감고 그 말을 따라 말하는 순간 오래전의 이탈리아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한다. 그 열병처럼 강렬했던 첫사랑이 있었던 시간으로 말이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있는 사람과 이미 그 폭풍우를 지나온 사람이 있다. 후자가 소설 속의 엘리오라면 영화 속의 엘리오는 전자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니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은 엘리오가 마주하는 감정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성적인 욕망, 몸의 변화를 낯설어 하는 소년의 수치심, 낫지 않는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는 아픔만큼이나 따가운 첫사랑의 여운을 비롯한 감정은 엘리오만의 것이 아니다. 관객은 가감없이 그 버거운 감정들을 받아내야 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관객은 1983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어느 이름 시골의 저택에 엘리오와 올리버라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된다. 소설과 스크립트의 근간과도 같은 회고적인 나레이션의 생략은 엘리오와 올리버가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 관객이 그곳에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회상을 생략한 시도에 대해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나에게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 중요했어요.”


“찬탈자”, 엘리오는 처음 본 사람에게 “뺏으러 온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올리버는 – 물론 그가 의도한 일은 아니겠지만 – 엘리오의 가장 사적인 공간인 방을 뺏어가는 사람이다. 방 뿐이겠는가. 훗날에는 엘리오의 마음까지도 뺏어가지 않는가.


아이러니한 것은 엘리오가 찬탈자라 간주하는 존재가 엘리오와 올리버 간의 관계가 진행됨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다. 모네의 언덕에서 올리버에게 한 차례 거절 당한 엘리오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올리버에게 약국에 들리자고 제안한다. 엘리오는 자신이 무심코 뱉은 그 말에 대해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침입자 같은 진짜 세상이 우리 삶으로 훅 들어왔다.” (원작 107쪽)


사랑에 빠지는 순간, 현실이 찬탈자가 된다. 엘리오에게 있어 올리버는 더 이상 자신의 공간을 침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공간을 공유하고, 셔츠를 나눠 입는 사람이며, 궁극에는 기꺼이 자신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는 사람인 것이다.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영화 대사)


올리버의 고백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는 시의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는 나의 이름으로 당신을 명명하는 것, 그것은 일련의 행위를 통해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에게 있어 이전과는 다른, 대체할 수 없는 어떠한 의미적 존재로 서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올리버는 이제 엘리오 자신보다도 더 엘리오에 가까운 사람이 된 것이다.

00:08:38

올리버가 2층에서 내려온다. 밤동안 오랜 비행의 여독을 다 푼 듯 보인다. 미국인인 그에게 이탈리아의 집안 풍경과 그 특유의 여유들은 낯설기만 하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만져보고, 소리의 출처를 따라 복도를 지나쳐 부엌의 마팔다를 들여다 본 후, 어느 정도 탐색을 마친 올리버는 정원의 아침 식탁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무심한 첫 장면은 펄먼 부부가 자신을 마치 사위처럼 대해주었다고 말하던 마지막 장면의 올리버의 목소리와 오버랩된다. 식탁에 합류해 자연스럽게 아침 인사를 주고 받는 올리버의 모습은 완벽한 타인이자 찬탈자였던 올리버가 엘리오의 일상에 서서히 동화되고 있음을, 손님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한편, 이 식탁 장면은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Call Me By Your Name>가 내포하는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살구 주스와 삶은 계란들이 담긴 볼, 바게트와 에스프레소가 오순도순 놓여있는 식탁에서 조금만 시선을 떼면 그 뒤로 안키세스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이 장면에 안키세가 필요했을까? 의식하지 않으면 포커스가 아웃되어 있는 정원 뒤로 안키세스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유럽식 아침 식사가 어색할 터, 힘을 조절하지 못한 올리버가 반숙 계란을 아작 낸다. 보통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였다면, 그 아작난 계란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거나, 올리버가 식탁에 앉은 장면과 그가 계란을 집어 오는 장면, 숟가락으로 계란을 치는 장면을 편집해 모두 보여주고, 그 상황을 설명하려 했을 거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몇 가지의 장면들을 기계적으로 잘라내고 조합하여 상황적인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 대신, 루카 감독은 차라리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인지 다가오는 여름에 어딘가 있을지 모를 그 별장을 방문하면 펄먼 가족과 올리버가 식사를 하고 있을 장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영화 전반을 통해 이처럼 꽤나 긴 시퀀스를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올리버와 엘리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다소 느린 호흡의 편집은 지루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의 주인공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기분을 주기도 한다. 긴 시퀀스들과의 대면을 통해 관객은 그저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을 관망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Call Me By Your Name>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00:38:40

차마 올리버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한적하고 넓직한 광장에서 피아베 전투 기념상을 사이에 두고,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띄엄띄엄 서툰 고백을 하는 엘리오 이전에 올리버의 고백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아도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고백이라는 점에서 엘리오의 것과 유사하지만, 차마 말로 하지 못하고 줄글로 써내려간 소심한 고백이다. 소심하고 은밀하지만 한편으로는 대담한 고백이자,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로 완성되는 진심을 알리는 전주곡과도 같은 고백이다.


엘리오는 일전에 수영장에서 올리버가 이야기했던 책을 발견하고 책 사이에 껴있던 올리버의 메모를 집어든다. 그 메모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에 대한 올리버 나름의 해석이다.


“The meaning of the river flowing is not that all things are changing so that we cannot encounter them twice but that some things stay the same only by changing."

강이 흐른다는 의미는 모든 것이 바뀌므로 두 번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함으로써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영화 대사)


같은 강물에 두 번은 들어갈 수 없는 것, 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흘러가는 강물이 필요하며, 강물은 흘러가기에 발을 담그기 전의 강물과 담그는 순간에 발끝에 닿은 물은 완전히 다르다고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분명, 이 변화는 강물에만 국한된 속성이 아니다. 강물에 발을 담근 시점의 나는 발을 담그기 이전의 나는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에 대한 은유이며, 그에 대한 올리버의 메모는 엘리오를 향한 올리버의 진심 어린 고백이다. 올리버는 고백이 담긴 이 책을 소파 위에 덩그라니 올려놓으면서 엘리오가 지나가던 차에 발견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엘리오와 올리버는 다시 만나겠지만, 20년 후에 마주한 엘리오와 올리버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며, 그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형태는 1983년 여름에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과는 다를 모습일거다. 변화가 결국은 같은 모습을 유지하게 한다는 역설은 여름이 끝나고 둘 사이에 찾아올 예견된 이별과 그것이 동반하는 변화가 그들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임을 말해준다. 변화를 통해서 강이 강이었음을 알 수 있듯이, 이별은 사랑이 사랑이었음을 확인하는 계기인 셈이다. 이 구절은 우정으로 둔갑한 감정들이 사랑으로, 또 그 사랑이 헤어짐으로 귀결하는 일련의 변화가 오히려 그 사랑을 영원하게 하기 위한 필연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 사랑과 관계된 어떠한 이유로도 엘리오와 엮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어 했던 올리버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전 저를 잘 알거든요. 세알을 먹으면 분명히 네 알 이상 먹고 싶어질 거예요.” (원작 50쪽)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절제하던 사람, 올리버는 자신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였을 것이다. 그의 쪽지는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헤어짐이 사랑을 영원하게 한다는 사랑의 사실에 대한 올리버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그 쪽지로 올리버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 끝은 결국 헤어짐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 그래야 한다면, 나는 이별함으로써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라고 엘리오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메모를 읽으면서 엘리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르는 게 없는 소년이니 진즉에 올리버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00:43:57

정전이 된 어느 오후, 아넬라는 엘리오에게 엡타메롱의 기사와 공주 이야기를 읽어준다.


“Ice bitte euch ratet mir was besser ist... reden oder sterben"

말하는 게 나을까요? 죽는 게 나을까요? (영화 대사)


감히 올리버와의 사랑을 꿈꾸는 엘리오의 심정을 이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 있을까. 영화는 1983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엘리오가 이 진실을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지 끝도 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누구한테 말한단 말인가? 마팔다? 그랬다가는 우리 집을 그만두고 나갈 것이다. (...) 마르지아, 키아라, 내 친구들? 말하자마자 날 외면하겠지 가끔 놀러오는 사촌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버지는 사고방식이 매우 자유분방한 편이지만 과연 이 문제도 그럴까?” (원작 83-84쪽)


엘리오의 말마따나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용기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사망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피아베 전투의 기념비 앞에서 엘리오가 고백한 이유는 엡타메롱 이야기 속에 있다. 죽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이 낫다, 엡타메롱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엘리오는 용기가 없어 결국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죽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을 거다.


“말하는 게 낫겠죠”


공주가 말한다. 고민 끝에 엘리오는 결심한다. 올리버에게 말하자. 그 말고는 말할 사람이 없으니까.


01:31:46

평소와 같은 점심이지만, 기류가 다르다는 것을 아넬라는 느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식탁, 머뭇거리며 책을 만지작거리는 올리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엘리오가 올리버를 모네의 언덕으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모네의 언덕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었을 거다. 엘리오는 모네의 언덕을 비롯한 장소를 “당신이 내 인생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당신을 꿈꾸던 곳”(원작 135쪽)이라고 묘사한다. 모네의 언덕, 예배실, 비밀 장소, 그리고 서점, 누구인지도 모를 타인을 꿈꾸며 혼자 찾던 장소들, 엘리오가 생각과 상념을 묻어두는 자신만의 공간에 올리버를 끌어들인 것은, “내가 꿈꾸던 타인이 올리버 당신이였어요” 라는 엘리오의 자각이자 고백이며, 나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일종의 유혹인 셈이다.


올리버가 들고 있는 책 <아르망스>는, 엘리오가 자신의 장소 중 하나인 서점에서 올리버에게 선물한 책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책을 건네주기 전 직원에게 펜을 빌린 후, 언젠가는 올리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신의 진심을 짧은 글로 적는다.


“Zwischen Immer and Nie(침묵 속에서 당신에게). 1980년대 중반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원작 136쪽)


엘리오가 소파에 올려둔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의 파편들>을 발견해주기를 바랐던 올리버의 마음과 같았을까. 엘리오는 시간이 흐른 뒤 이 짧은 글을 발견한 올리버가 애석함보다는 덜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 바란다고 고백한다.


<아르망스>의 옥타브는 올리버를, 옥타브가 사랑하는 아르망스는 엘리오를 닮았다. 아르망스가 사랑하는 옥타브는 고상한 몸가짐에 탁월한 재기까지 갖춘 남자로,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시선을 잡아끄는 용모의 인물이다. 따로 언급해주지 않는다면, 올리버에 대한 묘사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을 우정으로 속이려고 했던 옥타브의 모습마저도 엘리오와의 관계를 우정에서 멈추고 싶어했던 올리버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경우 단 한 사람만은 알아차릴 테지. 그리고 그 사람은 우정의 이름으로 나를 위해 슬퍼해줄 테지.’ 그는 멀리서 아르망스를 바라보았다. (아르망스 123쪽)


옥타브는 사랑을 믿지 않고 거부한다. 그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이끌리는 것보다 자신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그 의무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라고 믿는다. 의무감은 아르망스를 매력적이라고 느꼈음에도 옥타브가 자신의 감정을 섣불리 고백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하면 닮는걸까. 설상가상 아르망스도 그를 사랑하지만, 사랑하기에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서약을 만든다. 사랑을 빌미로 하는 일들에 대해 “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을 들이미는 것만큼 눈물겨운 것도 없다. 이는 사랑하지 말아야한다는 데에 들이밀 수 있는 그럴싸한 논리가 의무감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인 사랑을 의무감에 기대 저지하고자 하는 것,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의무감에 대한 집착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의무감이라는 장막은 사랑을 말할 수 없게 한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끝은 오해라는 비극이다.


극 초중반의 올리버는 자신이 만들어 낸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집착한다. 동성애가 죄를 넘어 악한 것이라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 특히나 자신에게 그렇게나 베풀어준 펄먼 부부에게 미안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올리버의 의무감과 집착은 사실상 엘리오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었으나, 올리버가 자신의 입으로 말해주지 않는 이상 올리버의 진심을 엘리오가 알 길은 없다.

<아르망스>를 읽고 올리버는 어느 오후 자신을 향해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던 엘리오를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오해하게 했나? 설마 그랬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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