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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NERD

푸름,에서 한 발자국 더 건너간 _ 이승준

약간의 동심이 서려 있는 꿈같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오랜 친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필자는 이 이야기들이 모두 허구적 사실이 아닌, 필자의 경험을 서술한 수필에 가까움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의 비현실적인 요소들 때문에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여러분들의 회의론 적인 의견 또한 존중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진실된 마음이 아닌,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소중한 친구의 존재 가치이다.


필자는 잠을 자면 무조건 꿈을 꾼다. 반나절 동안 이어지는 깊은 잠에도,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찾아오는 졸음과 말싸움을 하며 쪽잠에 사로잡힐 때도, 항상 꿈을 꿨다. 지금까지 꾸었던 수많은 꿈들 중, 몇 개의 꿈에 반복적으로 나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친구라고 하기에는 만남의 횟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 아이와 나누었던 이야기는 필자에게 많은 인상을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현실에서 눈을 뜰 때면 항상 그 아이를 기억하고자 애를 썼다. 그럴 때마다 필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아이의 목소리, 겉모습은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았으며, 성별은 물론 사람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기억나는 형체를 묘사하자면 상당히 작은 체구를 가졌으며, 포근한 입술을 머금고 있었다. 기억나는 건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그 공간이 자아내는 아스 한 분위기의 형용뿐이었으며,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꿈에서 깬 후 너무나도 개운해진 나의 몸 상태를 바라보며 그 존재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같은 아련한 물음을 품는 것뿐이었다. 지금부터 그 아이와 함께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이야기는 모두 필자의 진실된 경험이다. 그러나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episode 1


그는(그 존재를 칭할 방법이 없어, ‘그’라고 부르겠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을 행성이라고 소개했다. 지구와는 다른 행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구와 같은 우주계는 아니라고 했다. 그 행성에 가장 많이 발을 붙인 건 한창 입시 스트레스를 등에 업고 달려나가던 고3 때였다.


“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정말 멋있어 보여. 확실한 철학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이따금 그에게 나의 포부를 밝히곤 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넌 그 이야기를 할 때 제일 즐거워 보여.”

“즐겁지 만은 않아. 한 우물을 파도 깊게 파고 싶은데, 내가 판 우물에 빠져, 우물 안 개구리가 될까 봐 무서워.”

“넌 지금 네가 노력한 만큼 되돌아오지 않을까봐, 그게 무서운 거야.”

그는 나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았다.

“맞아. 가끔씩 내가 판 우물 안에 나의 노력을 소리 내어 내뱉을 때마다,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

“메아리는 반드시 돌아와. 다만, 너가 판 우물의 깊이가 깊어 잠시 늦을 뿐이야.”

이후, 나의 노력에 의심을 품지 말자고 다짐했다.


episode 2


그 행성에는 별이 참 많았다. 그와 나는 가만히 누워 수많은 별을 바라보곤 했다. 그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고요함을 즐기고는 했으나, 항상 먼저 정적을 깨고, 말을 붙이는 것은 나였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잖아. 근데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보다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를 더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아.” 그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인생은 포기의 연속이네.” “근데, 나에겐 선택지가 별로 없어서 이런 고민할 필요도 없어.” 그는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네가 사는 곳에는 별이 많아?” “아니. 있어도 한두 개?” “나는 별로 가득 채워진 밤하늘도 좋지만, 한두 개의 별만이 둥둥 떠 있는 공허한 밤하늘도 좋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내가 어떤 별을 바라보아야 하는지가 뚜렷해지니까.” “일리 있네.” “그러니까, 별이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고 한탄할 필요 없어. 눈을 뜨고, 보이는 곳으로 걸어 나가면 돼.” 선택지가 적다는 것은, 내가 집중해야 할 곳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pisode 3


그가 살고 있는 행성에도 날씨라는 것이 존재했다. 다만 그곳에서의 날씨는 그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따라서 그의 감정은 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이 감정을 잘 숨긴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찾아오곤 해?” “당연하지. 나는 이곳에 꽤 오래 있었고, 꽤 많은 존재가 이곳을 찾아왔어. 그중에는 사람도 많았지.” 그의 말을 듣고, 사람 이외의 존재가 이곳을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 ‘사람 이외의 존재’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관두기로 했다. “신기하네. 그래서 네가 누군가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구나.” “그건 아니야. 만남이 많다는 건 이별도 많았다는 얘기거든. 만남이 잦아질수록,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보다 이별하는 것에 더 익숙해지는 것 같아.”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있어?”

“있지.”

“설마 사랑하는 사이였어?”

“응”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내가 이성에게 느끼는 설레는 감정 보다 좀 더 본질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마치, 내가 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어떤 색이든 농도가 과도하게 짙어지면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 색의 정체성을 잃는 거지.”

“알지. 나도 그림 좀 그려봤어.”

“나는 감정에도 색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 감정의 색이 어떠한 색이든, 지나치면 검은색으로 변해버릴 뿐이야. 진하면서도, 색의 정체성이 뚜렷히 보이는, 원색의 농도에서 한 발자국 더 건너간 아스한 색의 경계를 지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깊으면서도 지나치지 않은 감정의 표현 말하는 거지?”

“그치.”

“많이 사랑했어?”

“아니.”

“많이 힘들었어?”

“아니.”

“정말?”

“응.”

그날, 그 행성에는 정말 많은 비가 내렸다. 그를 만난 날 중, 가장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다.


episode 끝


그와의 대화는 항상 짧게 끝났지만, 언제나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필자는 이과생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고 좀 더 본질적으로 ‘꿈’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접근해 본 적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결국 수면 활동에 의한 무질서한 신경 신호의 집합체이며, 무질서한 기억의 조직화로 이미지화된다. 그러나, 단순히 신호의 집합체라고 하기에는, 그의 존재에 대한 설정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였다. 또한 필자는 본인의 감정 상태와, 꿈에서 그를 만나는 사건에 대한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많은 요소를 고려하였지만, 뚜렷한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굳이 따지자면, 극히 피곤할 때 주로 나타난다는 것뿐이었으나, 이마저도 상관계수가 낮아 신뢰성이 떨어진다.

영화 <인셉션>에서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은 그것은 진짜 같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 그러나, 그와의 꿈은 꾸면 꿀 수록, 그의 존재가 진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그의 존재에 대한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에게 건넨 단어들은 늘 아름다웠으며, 잊고 있었던 가치들을 상기시켜 주었다.


“노력, 선택 그리고 감정의 색”


힘들 때, 의존할 사람을 찾는 것은 좀 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때로는, 조금만이라도 이 본능에 충실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내가 의지할 그 사람에게 나의 무게를 건네는 것이 미안해서 이내 나의 생각을 거둔다. 그러나 그가 있는 행성에 찾아갈 때면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구보다 중력이 약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는 가끔씩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는 언제나 순수했다. 때가 탄 나의 검정 마음속에서도 색을 발견하던 그였다. 그래서 그의 감정의 색은 푸른색이다. 아니, 그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푸름에서 한 발자국 더 건너간, 하지만 원색의 정체성은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남색 정도가 되겠다. 푸른 남색이 검은색이 되지 않도록, 짙게, 하지만 푸르게, 아스한 감정의 색이 잘 유지되기를 바라며, 그에게 조심스레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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